1991년 불리정
광산구 삼도동 도야마을 석문산 자락에 지어진 ‘불리정’은 동네에서 1백 50m쯤 떨어진 야트막 한 언덕빼기에 지어져 있다. 동쪽으로 수백구르의 소나무가 숲을 이루며 소나무가 옆을 지키고 있 었다. 진주정씨(晋州鄭氏)‘정복규’가 지었다는 불리정은 비교적 관리가 잘 되어 있었다. 팔각으 로 된 정자 내에는 한문으로 스인 현판 글씨가 훼손되지 않고 잘 보존되어 있으며 정자위에서 내 려다 보인 동네와 건너편에 빼어난 경관인 병풍산이 한눈에 볼 수 있어 더울 아름답다.
이 정자는 이 마을 진주정씨(晋州鄭氏)인 정복규에 의해 1978년 무오년(戊午年 ) 에 이은 육각 정으로 그이 규모가 마을의 촌정(村亭)에 불과한 조그마한 정자이다. 정자 자체의 내부가 방이 없 는 마루로 되어있고 사변에 손잡이 난간이 설치되어 있으며 주위사방이 송림(松林)으로 둘러있어 그 분위기가 매우 아담하다. 정자 앞에는 [월파별업(月波別業)]이라고 쓰인 석비(石碑)가 서 있 고 정자에 딸린 천여평의 과원이 그 옆에 자리하여 이 정자의 분위기가 한층 더 좋다. 정내(亭內) 에는 [불리정]이라는 대서(大書)현판과 이 정자의 내력을 기록한 다섯 개의 각판(刻版), 여섯 개 의 주련(珠聯)족자가 각각 제 위치에 부착되어 그 풍미를 더해 주고 있다. 그리고 이 정자의 한가 지 특색이 있다면, 다른 정자와 달리 십여개의 목침(木枕)이 있고, 이 목침을 일열 횡대로 걸어놓 은 걸고리가 있으며 또 목재 자체가 보기 드문 깨죽나무로 되어 그듸 보존 수명이 매우 길다는 것이다. 이 정자의 주인인 월파 정복규(月波 鄭福圭)는 단종조(端宗組)의 절신(節臣)인 정분(鄭泍)의 17 대 손으로 일찍부터 학업에 종사한 주경야독(晝耕夜讀)의 깨끗한 선비이다. 이러한 그가 갑자기 이 정자를 지어 그 이름을 [불리]라 한 것은 이곳의 아름다운 산수를 사랑하여 그의 만년을 소일 (消日) 하기 위해서다.
그의 말에 의하면 [불리]란 이 뜻은 세거지지(世居之地)인 고향을 떠나지 않는다는 의도로 붙인 것이라고》 하지만 도 한편으로는 [도불가수유리야(道不可須臾離也)]라는 깊은 의미가 내포된 아 주 이상적인 명칭이다. 이 명칭하나만으로도 이 정자 주인의 사람됨이 어떠하다느 것을 능히 짐작 하고도 남은 바 있다. 그리고 관련시문(詩文)중 이 정자의 소재를 현재의 나주인 금성(錦城)으로 표기한 것은 그 당시 이 지역이 광주가 아닌 나주에 소속되어 있었기 때문이다. 원래 이 지역이 나주소관으로 되어 있었으나 정부의 행정개편에 의해 1949년 8월 14일 나주에서 광산으로 이관되 었고 또 1988년 1월 1일 광산에서 광주시로 편입되어 오늘에 이르고 있다.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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봉산정사
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